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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해양 발달사 - 1

제목 유럽의 해양 발달사 - 1
글쓴이 등록일 200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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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해양학의 역사


제 1 절 인류 역사속의 해양학

1) 고대에서 중세까지

우리 나라를 비롯한 해안선이 잘 발달되어 있는 나라의 연안에서는 패총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패총에서는 어구 및 배 제작에 쓰인 물건들이 종종 발견되어 바다가 수렵장으로 쓰여왔음을 지시한다.

고대에 있어 조석의 연구는 어업 및 항해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조건 임. 이를 위하여 달의 모양 관찰,태풍의 도래 주기 등을 기록하게 됨 해륙 분포에 관한 지식은 5,000년 이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및 크레타지방의 문명과 함께 발전하였다.

고대 이집트는 기원 5,000전부터 홍해로부터 인도양의 아프리카 연안과 통상을 한 페니키아인 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림 1.1.1).



솔로몬 (기원전 975 - 930)은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아프리카 남동국 오피르에 탐험대를 파견, 식민지를 건설했다..

한니발 (기원전 470년)은 카르타고 사람으로 60척의 선단을 이끌고 서아프리카의 나이제리아, 세네갈, 기니아 등을 항해하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해양학적 현상은 때때로 바다의 이름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홍해의 경우 "red sea"란 말은 고대로부터 이 지역에서 적조가 자주 발생하여 바닷물 색이 붉게 변하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고래 그리이스 인들은 BC 4 세기경 이미 간만의 차이가 달과 지구의 인력에 의해서 형성됨을 이해함. 해양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아리스토탈레스 (기원전 384-322)는 물이 증발, 구름, 강수 등으로 순환하는 것을 설명하였으며 에게해 (Aegean Sea) 에 서식하는 180 여종의 동물과 100 여종의 어류, 60 여종의 무척추동물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오래전 부터 수 천 km 태평양 (Pacific Ocean)을 항해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섬의 위치와 섬 사이로 흐르는 해류의 방향등을 해도로 남김. 또한 이들의 해도에는 구름의 형태, 바람의 종류 등에 관한 기록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림 1.1.2-a,1.1.2-b).



로마제국은 전 세계에 걸쳐 넓은 제국을 이루었으나 해양과학에는 큰 공헌을 하지 못함. 따라서 중세 이전 까지는 오히려 아라비아인들이 해양과학 및 무역에 더 큰 공헌을 하였다..

노르만 민족인 바이킹은 8-11 세기에 그린랜드를 탐험하였으며 콜롬버스 보다 500년 먼전 그린랜드의 라브라도를 경유하여 북미 대륙에 도착함. 지금의 그린랜드는 그 당시 말 그대로 녹색의 풀이 있는 지역으로 여겨지나 그 후 한냉시대의 도래로 바다가 얼어붙어 항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명나라 시대 (Ming Dynasty, 1368-1664) : 명나라 시대의 중국인들은 여러 차례의 항해를 한 기록을 갖고 있으며, 당시기록에 37,000 명의 인원과 317척의 배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의 중국배는 서양과 비교시 훨씬 그 크기가 큰 것으로 알려진다.(예, 배길이 444 ft, 폭 180 ft). 또한 중국은 서양 사회와 비교시 훨씬 발달한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는 자원도 풍부하여 항해의 목적이 서양과는 달리 약탈이나 정복에 있지 않고 주로 국력을 과시하는데 있었으며, 주변국가와 조공 형태의 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도 15세기경 국가의 주 관심이 내실 다지기 방향으로 기울며(예,만리장성 복구 사업, 양자강 대운하 준설 등) 점차 해양 활동이 줄어 듬. 그러나 서양의 경우 해상 활동은 오히려 중세 말에 Spain, Portugal 등에 의해 더욱 활발해 지기 시작함.

2) 중세에서 근대까지

십자군전쟁 (1096-1270)은 서양에 자석을 보급하였으며 이로인하여 항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13세기에 들어서 배 의 키기 오늘날의 키 모양을 갖추며 항해 속도도 빠르게됨. 특히 나침반을 이용한 항해기술과 정확한 해도가 제작되어 항해를 통한 장거리 항해가 성행하였다.

몽고에 의한 서아시아 및 유럽 일부의 정복은 아시아와 유럽의 무역을 가능케 하였으며, 이 때 이탈리아인 마르코폴로가 1271년부터 24년간 몽고, 중국, 동남아시아를 돌고 동방견문록이란 책을 출간함.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많은 탐험가들에게 아시아와 인도 탐험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15세기 경 활발한 탐험의 역사를 열게 하였다.

중세 이후 바다의 개척에서 가장 뛰어났던 사람들은 포루투칼 인으로 15세기부터 150년간 많은 탐험을 하였다. 항해왕으로 불리운 포르투갈의 헨리왕자 (1394-1460)는 십자군전쟁 이후 포루투갈 남쪽 사그레스 성내에 항해연구소를 설치하여 천문, 지리, 지도 등에 대한 연구와 아프리카연안 탐사의 계획을 세운다.

1441년 포루투갈 탐험대에 의하여 아프리카흑인 두 명이 잡혀오자 이를 시작으로 아프리카흑인에 대한 노예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1444년 야니시는 아프리카인 20명을 잡아다 노예로 팔았다.

1488년 디아스는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하고 회항하는 큰 공을 세운다.
1947년 7월 8일 바스코 다 가마 (1469-1524)는 포르투갈의 리스본항을 떠나 출항한지 10개월 만에 인도에 도착했다. 그는 대서양 한 복판을 통하여 아프리카의 남단을 통과한 후 인도에 도착하였다..

이 당시 유럽 사람들이 인도나 중국 등 아시아 탐험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향신료, 즉 음식에 맛을 내는 조미료 때문이었다. 그는 3차에 걸친 인도 항해을 통하여 유럽에서 인도에 이르는 길을 열었으며 인도의 켈리컷을 점령하여 최초의 인도 식민지를 개척한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 콜롬부스(1451-1506)는 스페인 여왕 이사베라의 승낙을 얻어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호 (280톤급)와 니나, 핀타 등 2척의 배를 이끌고 인도를 향해 출발함. 지구는 둥글다고 믿은 그는 대성양을 가로지르면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믿었음. 1492년 10월 12일 그는 바하마 근처의 산살바도르에 도착,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믿어 그 근처를 서인도 (West Indies), 토착민들을 인디안이라 부름. 그는 항해를 통하여 무역풍과 편서풍의 존재를 알았으며 그 후 1503년까지 4번에 걸친 대서양 횡단을 통해 카리브와 남미대륙까지 탐험함.

이탈리아출신 아메리고 베스붓치 (1451-1512)는 브라질 연안을 탐험하였으며, 자신의 이름을 따서 신세계를 아메리카라 부름.
영국의 헬리 (1656-1742)는 지구의 주요 바람과 해류의 관계를 보고하였으며 남위 52도 까지 항해하며 자기편차와 무역풍에 대하여 보고함. 그는 76년 주기의 헬리혜성을 발견함.

1513년 스페인의 발보아는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고 파나마 만에서 태평양을 보았음.
발보아의 태평양 발견 이야기를 듣고 포루투갈인인 마젤란 (1480-1521)은 세계일주 결심을 함.
그는 스페인왕 칼 5세를 설득 5척의 배를 얻어낸 뒤 1519년 9월 카비리아 항을 출항함. 다음 해 10월 그는 지금의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고 11월에 태평양에 이르는데 성공함. 1521년 3월 마젤란은 필리핀의 세부에서 원주민의 독화살에 맞아 사망함. 마젤란이 죽은 후 남아있던 선원들은 1522년 9월 6일, 출항 후 3년
27일 만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세계일주를 마침.
마젤란은 항해일지를 통하여 태평양 주변의 섬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 의하여 몰락한 후 해상지배권은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옮겨감.

네덜란드의 대 항해자 테즈먼 (A.Y. Tasman)은 1642-1645년간 호주를 항해하여 호주, 뉴질랜드, 피지, 통가, 타스마니아 등을 발견하였으며 동해의 오호츠크와 사할린 방면까지 방문함.

덴마크인 베링 (1681-1741)은 러시아 황제의 명령으로배 링해를 탐사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약 88 km의 해협이 존재함을 보고함. 또한 1741년 캄차카 반도와 일본근해까지 항해함.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뉴턴 (Newton)은 조석이 생기는 원리를 달과 지구, 태양의 인력으로 설명함.

영국인 선장 제임스 쿡 (1728-1779)은 1768-1780
사이에 H.M.S. Endeavour로 항해하면서 세 차례에
걸쳐 세계 일주를 함.

* HMS : Her (or His) Majesty's
Ship의 약자로 왕이 소유하고 있는 배, 또는 군함을 의미함

쿡 선장은 단순한 항해의 차원을 넘어서 해양 조사의 성격을 띤 항해을 하였으며 남쪽은 남극해로부터 북쪽은 베링해까지 조사함. 첫 번째 항해 (1768-1771)에서 그는 타이티를 발견하였으며 뉴질랜드에 대한 지도를 작성함. 또한 호주의 동부 연안에 대한 지도를 작성함. 두 번째 항해는 1772-1775 사이에 있었으며 이 기간 동안 남극 대륙이 존재함을 확신하게 됨. 또한 뉴 칼레도니아, 피지, 통가, 및 남극 대륙을 보고함. 세 번째 항해는 1776-1780에 이루어 졌으며 이 기간 동안 남미 대륙을 돌아 태평양에 이르는 항로를 개발함.
그는 52세의 나이로 하와이에서 원주민에 의하여 사살되었음.
쿡 선장은 그의 조국인 영국을 위하여 영토확장에 크게 기여함. 그는 우수한 과학적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부하에게는 엄격하고 또한 자상한 지휘관이었음. 쿡 선장은 항해동안 선원들의 건강 및 청결에도 관심을 기울여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끓이지 않고 먹게함. 따라서 그의 항해 동안 선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괴혈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음. 영국 왕립학회는 평민 출신인 쿡 선장에게 1776년 2월 영국 최고의 명예인 코플리 메달을 수여함.

(제임스 쿡 선장의 사인)



3) 근대의 해양학 역사

근대에 들어 증기 기관이 새로운 동력원으로 자리를 잡음.
1690년 프랑스의 파핀은 증기기관을 발명함.

벤자민 플랭클린(1706-1790) : 중미의 맥시코만 내에 있어서 걸프 난류가 존재함을 보고하며 아울러 Gulf Stream 흐름을 지도에 나타냄. 1807년 미국의 풀턴이 증기 기관이 달린 배를 건조함.

1819년 증기기관을 보조 동력으로 하는 범선이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함
러시아인 크루센스턴 (1770-1846)은 1782년에 발명된 믹스식 최고최저 온도계를 이용 심해의 수온을 측정함.

1823- 1826년에 행해진 "프레드훼리야드" 호의 세계일주 항해는 유명한 물리학자 "렌즈"가 동승하여 수층별로 채수 함. 렌즈는 내압 해수온도계를 발명하여 수심 2,000m 까지의 수온을 측정하는데 성공함.

1841 HMS Beacon 호의 지중해 탐험. Edward Forbes (1815-1864) 지중해의 에게해 (그리이스와 터키 사이) 에 서식하는 해양 생물에 대한 조사를 토대로 2,500 년전 아리스토탈레스가 작성한 목록과 비교함. 그는 수심이 깊어 질 수록 채집되는 종이 줄어들며 또한 그 량도 작아짐을 발견함. 이를 토대로 “AZOIC (무생물대)” 라는 용어를 정립하였으며, 수심 600 M 이하에는 생물이 서식하지 않는 것으로 단정 지음. 따라서 600 M 이하의 수심에서 채집된 생물은 그 존재를 무시하거나 고려하지 않음

1879년 석유를 연료로 하는 기선이 등장함.
1893년 최초로 디젤 기관이 발명됨.

HMS Beagle의 탐험 : 영국의 피츠로이 함장이 이끄는 비글호는 (무게 242톤, 목선)남아메리카 서해안과 태평양의 여러섬을 탐사하는 임무를 띠고 1831년 영국을 떠남. Beagle 호에는 "종의 기원 (origin of pecies)"을 발표한 다윈 (1809-1882)이 동승함.



비글호 탐사를 통해 다윈은 다양한 해양생물을 채집 정리, 발표함.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 연안의 페루에서 950km 떨어진 갈라파고스 군도에 도착한 다윈은 이 섬에 서식하고 있는 핀치새의 생태를 관찰한 토대로 진화와 이를 바탕으로한 종의 기원을 후에 발표하게 됨 비글호는 계속해서 타이티, 뉴질랜드, 호주 및 인도양, 대서양을 횡단한 뒤 4년 10개월 만인 1836년 10월 영국에 돌아옴.

1851년 영국의 도버해협과 프랑스 케레이 항구 사이에 최초로 해저케이블이 설치됨.

1860년 경 지중해의 수심 2,000m에 설치된 해저케이블( 대륙간 전보를 위함)이 수리를 위하여 육상으로 끌어 올려지면서 케이블에 심해 산호와 같은 다양한 심해저 생물이 서식하고 있음이 확인됨. 따라서 포브가 주장한 수심 600m 이하의 무생물대 학설은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다윈의 종의 기원과 심해 생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대규모의 해양생물 조사가 시작됨.



HMS Challenger Expedition (1872-1876): 첼린저호의 탐험

영국의 첼린저호는 1872년부터 1876년까지 4년간 전 세계를 탐험하며 해양조사를 수행함. 첼린저호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장비를 갖춘 2,306 톤의 목조 군함 범선으로 조사 목적은 해저전선 부설을 위한 대양저 조사임.
Sir Wyville Thomson (1830-1882) 은 Chellenger expedition 의 책임을 맡고 전세계 해양의 모든것 (생물, 물리, 화학, 지질 등)에 대한 조사를 위하여 출항 함. Chellenger 탐험은 전 세계의 해양을 상대로 표층, 중층, 저충의 수온, 해수 (water sample), 저질 (sediment) 및 이에 살고 있는 생물,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함.

첼린저호에는 저명한 해양 생물, 물리, 화학 및 지질학자가 탑승하여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및 남극을 항해하며 68,890 해리 362 조사정점에서 해양에 관한 종합 조사를 실시함.



첼린저 탐사는 측심, 측온, 채수, 드렛지, 트롤 등으로 얻어진 수 많은 해양생물 표본과 저질표본, 각 위도별, 각 수층별 해수 표본 등을 당시의 세계적인 학자들이 모여 연구분석함.

첼린저 조사에서 얻어진 지질 시료는 총 12,000개로 이를 머레이 (1841-1914)등이 분석하여 심해지질의 대 연구를 완성함. 특히 심해의 연니와 적점토를 발견, 분석하였으며 적점토에 망간단괴가 포함되어 있음을 최초로 알게됨.

지구물리 분야에서는 지자기의 측정으로 항해 중 콤파스의 편차가 생기는 원리를 이해하게 됨. 또한 전 세계 어느 바다든 수심 183m 에는 영구 수온약층 (permanent thermocline)이 형성되어있다는 사실을 알 게됨. 또한 광범위한 대양저 범위에 있어 수온은 약 4 ℃로 거의 일정하다는 사실을 알게됨.

해양화학자인 디트마 (William Dittmar, 1833-1894)는 첼린저 탐험에서 얻어진 해수를 분석하였으며 그 결과 전 세계 어느 바다에서도 염분의 차이는 있어도 그 속에 포함된 원소의 구성비는 일정하다는 사실을 알게됨.

첼린저 탐험의 결과는 분석하는데 20년이 소요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총 50권의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그 내용은 100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서 훌륭한 해양학 참고서적으로 많이 인용되고 있음. 특히 디티마에 의한 해수 분석결과는 지금도 학계에서 자주 해양화학 연구 논문에 인용되고 있는 실정임.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 (Fridtjof Nansen 1861-1930) : 난센은 북극의 빙산이 바람과 해류에 의해 북극점으로부터 동부 그린랜드로 이동한다고 주장함. 또한 그는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난센채수기를 발명한 장본인임.

와그너의 대륙이동설 (Alfred Wegener 1880-1930) : 독일의 기상학자이며 천문학, 지질학자인 와그너는 대륙간의 해안에서 발견된 화석, 현생종 등을 고찰한 결과 한 때 지구의 모든 대륙이 하나의 대륙, 즉 판게아대륙 이었다고 주장함.

그는 1930년 그린랜드의 탐험에서 50회 생일을 이틀 남기고 사망함. 와그너가 살아있을 당시 그의 이론은 격렬한 반박과 비난속에 그 빛을 잃어 당분간 그 학설 마저 잊혀져 버림. 그러나 이차세계대전 이 후 미국 프린스톤대학의 헤스 교수에 의한 대륙확장설이 제시되면서 다시 그의 학설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으며 그의 학설을 세계적으로 인정하게됨.

독일의 메테올호의 해양학적 조사 :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독일은 일차세계대전의 패전에 따른 국가 부흥을 과학중흥으로 내 세우고 이의 일환으로 대서양에서 메테올 호를 이용 대규모의 해양 물리, 화학, 생물, 및 지질학적 조사를 전개함. 이는 다른 강국에 자극제가 되어 전격적인 해양탐사의 시대를 도래케 함.




4) 2차 세계대전 이후

2차 세계대전 중 군사적 목적의 대규모 해양탐사가 빈번해 졌으며 이로 인하여 해양학적으로 큰 발전을 초래함
전쟁 중. 후기의 과학기술 중 전기, 전자 공학의 급격적인 발전으로 해양 조사계측기 제작에 놀라운 발전을 함.

1943년 프랑스의 해군 장교인 쿠스토 (Jacques-Yves Cousteau)와 그의 동료 까냥(Emile Gagnan)은 천해 에 인간이 압축공기를 이용해 직접 잠수를 할 수 있는 기기인 스쿠바 (SCUBA, Self Contained Underwater Breathing Aparatus)를 개발하여 천해 탐사의 역사를 바꾸어 놓음. 전쟁 이 후 미국에 귀화한 그는 재단을 설립 스쿠바 다이빙을 보급하는데 앞장섰으며 전 세계의 오지를 칼립소란 연구선으로 탐사하며 많은 지리, 생물학적 교육 필름을 제작함.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선진 국가들은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남극, 북극 해의 해저 지형에 대한 소상한 지도를 작성하였으며, 특히 해저 산맥, 해저 협곡등이 일정한 유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져 이를 토대로 대륙확장설이 제기됨.

프린스톤 대학의 헤스 교수 (Harry Hess)는 대서양의 중심에 발달되어있는 해양저 산맥의 형성과 대륙연안에 발달되어있는 해구 (Trench)가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으며 결국 해양 지각판은 해양저 산맥의 중심에서 형성되어 확장되어 해구에서 대륙의 지각판 밑으로 들어가 소멸된다는 학설을 세움. 이는 와그너가 주장한 대륙이동설의 기작을 설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와그너의 대륙이동설은 다시 빛을 보게 됨.

2차 세계대전 이 후 해양탐사의 규모가 커지게 되자 한 나라의 힘 만으로는 조사가 힘들게되어 국제 협력에 의한 공동 연구가 활발히 전개됨.
1955년 국제태평양공동조사 (NORPAC)가 미국, 일본, 케나다 등 3개국의 참여로 이루어졌으며 1956년 국제 적도 태평양 공동조사 (EQUAPAC)가 미국, 프랑스, 일본 등 3 국의 참여로 이루어짐.

70년 대 말기에 시작된 심해저 탐사는미국과 프랑스 공동으로 해양저 산맥에 대한 탐사 (French-AmericanMid-Ocean Ridge Undersea Study, FAMOUS)로부터 본격화 되기 시작함. 특히 갈라파고스군도 부근에서 엘빈이라는 심해정을 이용한 탐사에서 지구상에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종류의 심해저 생물이 발견됨. 특히 이 곳 에서는 길이 1 - 2 m의 초대형 관벌레 및 패각길이 20-30cm의 심해 홍합등이 발견됨.

갈라파고스군도에 발견된 심해저 생물들은 열수분출공 (hydrothermal vent)부근에 집중적으로 서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육상 또는 천해 해양생태계에서 보기 드믄 박테리아와 연체동물, 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동물과의 공생관계를 갖고 있었음. 이들 공생박테리아는 열수분출공에서 나오는 황화가스 또는 메탄가스를 이용 에너지를 생산하고 이를 공생관계의 숙주가 이용함. 80년 대 이후 이러한 박테리아와 패류와의 공생관계는 천해조간대에서도 많이 발견되어 해양생태계의 먹이사슬 연구에 새로운 과제로 떠오름

* 심해탐사정 Alvin : 1964년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에 의하여 군용 탐사선에서 해양 탐사용 잠수정으로 개조됨. 해저협곡, 해저산맥 등의 탐험에 널리 쓰였으며 북극 근처에서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탐사에 쓰여 널리 알려짐.


심해잠수정 엘빈이 모선인 루루에서 심해로 내려지고 있는 장면




갈라파고스군도 부근 해양저산맥 열수공 주위에 서식하고 있는 대형 관벌레. 관의 길이는 1 내지 2 m 정도이며 황화가스를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박테리아를 몸안에 키우고 있음.



갈라파고스군도 부근 해양저산맥 열수공 주위에 서식하고 있는 초대형 심해담치. 관벌레와 같이 체내에 공생 박테리아를 배양하고 있으며 박테리아에 의존하여 서식함.



70년 대 이후 해양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발명 중의 하나는 인공위성과 인공위성에 찍은 영상 자료를 이용한 해양학 임.

1978년 해양탐사용 인공위성 SEASTAT 발사. 해양의 수온 및 해안선, 해양 생산력 측정 등이 원격탐사 기법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 미국 해양관장국인 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에서 발사한 NOAA 해양관측 위성, 상업용 위성인 LANSAT 위성 등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해양에 관한 자료를 송신함



위성에서 찍은 사진은 수표면의 온도, 플랑크톤의 량, 바람의 방향 심지어 어군 및 회유성 대형 해양포유류등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며 연안의 경우 해안선의 변화, 갯펄의 면적, 조간대의 범위측정 등에 다양하게 이용됨. 특히 전 세계적인 수온분포는 NOAA 위성을 통하여 전 세계에 실 시간으로 보내져 연안의 어업적, 해양학적 탐사나 산업에 널리 쓰이게 됨.

1985년 이후 열대 해양순환 과 해면온도 이상 형성의 역학적 특성 및 이에 대응하는 대기 대순환 및 강수량분포 등의 연구를 목적으로 TOGA 계획이 10년 연구 기간으로 설정 운영됨. 특히 TOGA에서는 엘니뇨현상의 특성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수행함. 1992년에는 해양연구소의 온누리호가 TOGA 연구에 참여함.
1991년 부터는 10년 연구계획으로 WOCE가 형성되어 일본, 미국, 한국 등 다양한 국가가 이 계획에 참여하여 연구를 수행중임.

70년 대 이후 해양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발명 중의 하나는 인공위성과 인공위성에 찍은 영상 자료를 이용한 해양학 임.
1978년 해양탐사용 인공위성 SEASTAT 발사. 해양의 수온 및 해안선, 해양 생산력 측정 등이 원격탐사 기법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으며, 그 후로 미국 해양관장국인 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에서 발사한 NOAA 해양관측 위성, 상업용 위성인 LANSAT 위성 등이 지구 주위를 돌면서 해양에 관한 자료를 송신함

상업적 해양탐사용 인공위성인 랜드셋. 1972년에 1호가 발사된 후, 최근에 7호까지 발사된 상태임.
궤도의 위치는 남.북극을 통과하는 극궤도로 고도 700 km - 915 km 까지의 높이를 가짐
매일 15회를 돌고 있으며 따라서 16일 후에는 같은 지역의 상공으로 돌아옴. Landsat이 지구를 한바퀴 도는데는 약 103분이 소요됨.
관측 자료의 범위는 185 km x 170 km 범위의 것을 얻게 되며 이 같은 지역을 scanning 하는데는 약 24초가 소요됨.
Sensor로 MSS (Multi-Spectral Scanner) 와 TM (Thematic Mapper)를 탑재함 관측과 데이터 송신은 모두 전기적인 신호로 지구에 보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