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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 이야기 - 2

제목 범선 이야기 - 2
글쓴이 등록일 200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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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Galleys)


갤리선은 길고 폭이 좁으며 재빠른 노를 가진 전함으로 예비의 돛을 달고 있었다. 갤리선은 낯은 측면과 짧은 폭 그리고 얕은 흘수(吃水) 때문에 안정성과 항해의 적합성이 제한되었다. 초기의 갤리선은 기원전 12세기에 건조되었으며 한 줄의 노 젖는 자리와 돛대 하나 그리고 사각형의 돛을 가지고 있었다. 갤리선간의 마지막 해상전투는 18세기에 발발했다.


최초의 갤리선은 페니키아인들의 것으로서 약 600년간 지중해의 가장 강력한 전함을 상징하였다. 기원전 700년경에 양현에 노가 상하 2단으로 있는 갤리선(bireme)이 바다에 출현하였으며 200년 뒤에는 그리스인들이 3단으로 노가 있는 갤리선(trireme)을 도입하였다. 이들은 모두 적함의 선체를 관통시키기 위해 선수에 충각(衝角)을 장치하고 있었으며 화살과 창으로부터 노잡이들을 보호하기위해 단단한 방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12세기경의 삼각형의 돛을 단 한 개 혹은 두개의 돛대를 지닌 갤리선은 베니스, 제노아, 아말피시(市)의 노급(弩級)전함 ‘dreadnoughts’이었다. ‘galley’라는 명칭이 태어나게 된 배경은 배의 선수에 위치한 충각이 황새치’galeos’와 닮았기 때문이다. 이 갤리선들은 길이가 40m-50m가량이며 폭이 5m-8m 그리고 흘수가 2m 가량이었으며 후방에서 순풍을 만날 경우 12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대다수의 갤리선들은 양측에 2단의 노를 지니고 있었으며 14세기와 15세기에는 대부분 단지 한단의 노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각각의 노는 3명이 저었으나, 가장 커다란 배의 경우는 5명까지도 저었으며 노의 길이는 12m까지 되는 것도 있었다. 평균속도는 일반적으로 3-4노트였으며 전투시에는 7-8노트까지도 내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뱃사람들이 노를 저었으나 곧 죄수나 노예들의 강제노역을 사용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노예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는 갤리선의 명성을 가장 악명 높은 선박으로 만들었다.

해상전투는 육박전과 함께 끝났다. 갤리선들은 선수(船首)의 충각(衝角)이 적의 선체에 질주해 들어간 순간 대개 3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그들의 강한 전사들을 적의 선박에 상륙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페니키아시대 이후로 이러한 충각은 충돌후 부러져 나가게 하려고 고안되었는데 그럼으로써 공격선박을 자유롭게 물 위에 떠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강력한 화살총과 소형대포 그리고 쇠뇌(고무줄을 이용해 돌이나 화살, 창등을 날리는 무기)로 구성된 무기는 가장 짧은 거리에서 적의 선박을 파괴하여 난파시킨다.

9세기 중반무렵 베니스는 지중해의 해상세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된다. 매년 그리스도 승천일에는 베니스공화국의 바다에 대한 의존과 해상에 대한 관심을 선언하기 위해 국영갤리선 ’Bucentauro’호가 바다로 노를 저어 나가는 것에서 의식이 시행되었으며 공화국의 지도자 ‘Doge’는 금반지를 바다에 던짐으로써 도시와 바다를 상징적으로 결혼시켰다. 좌측의 우표는 국영갤리선을 보여준다


1530년, 황제 찰스5세는 말타섬을 성 요한 기사단에게 수여하며 모든 이교도들 특히 터키인들과 싸우라는 임무를 맡겼다. 기사단은 갤리선들과 몇 척의 갈레아스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함대를 조직했다. 선박의 선수와 선미에는 장식들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선체는기사단의 색을 뽐내고 있었으며 돛은 화려한 말타섬의 십자가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판아래의 사정은 달랐다. 범죄자들과 터키의 전쟁포로들이 가장 비인도적인 환경하에서 사슬로 노에 묶여있었던 것이다. 선박들은 교황의 축복과 함께 성스러운 노동수사들을 태우고 있었으니 다른 기독교 국가의 선박들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에게 통행권을 내주었다. 우표위에 보이는 갤리선은 1600년경 기사단장의 ‘Capitana’호이다.

갈레아스선(galleass)은 갤리선의 다소 큰 형태로서 ‘galea grossa’ 라고도 불리웠다. 50m의 길이와 (후에 70m에서 80m까지 발전) 16m의 넓이에 삼각형의 돛을 단 여러 개의 돛대를 갖춘 갈레아스선은 16세기 초에 선을 보였다. 극도로 긴 노는 4명에서 7명의 노잡이들이 노를 저었으며 총문에는 어느 방향으로도 사격이 가능한 총을 70정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총 승무원은 노잡이와 선원과 군인들을 포함해 800명까지 승선할 수 있었다. 갈레아스선의 항해능력은 갤리선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으며 겨울철의 항해도 가능하였다.


좌측과 아래쪽의 우표는 역사상 가장 큰 갤리선의 전투로써 1571년 그리스해안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레판토 해전’을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 유럽국가들로 구성된 함대인 성동맹(Holy League)-대부분이 스페인과 베니스 말타 그리고 교황청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25세의 돈주앙의 지휘아래 알리 파스차 제독이 이끄는 터키군을 무찔렀다. 연합함대의 구성은 200척의 갤리선과 6척의 갈레아스선 그리고 터키군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후방에 노가 없는100척의 선박이었으며 선원, 노잡이, 군인을 포함해 약 80,000명의 승무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터키군의 숫자는 약 274척의 갤리선과 갤리엇(galliot-소형쾌속의 갤리선) 그리
고 모든 승무원 88,000명 이었다. 양측이 조우했을 때 피의 대학살이 일어났다. 갤리선은 다른 갤리선과 엉키었고 노는 쪼개졌으며 총은 표적도 없이 발사됐으며 전사들은 적의 배에 올라 격렬한 육박전을 벌였다.

결국 결과는 연합군의 후미에 확보된 6척의 거대한 갈레아스 선과 100척의 선박에 의해 결정되었다. 양측은 대학살 후의 엄청난 사상자로 인해 고통 받았다. 비록 동맹군은 13척의 배를 잃었을 뿐이지만 7,600명의 사망자와 또 그만큼의 부상자를 내었기 때문이다. 터키군의 200척이 넘는 배들도 가라앉거나 해변에 얹혔으며 30,000명이 넘는 사망자중에서 배와 함께 침몰한 많은 노잡이들이 쇠사슬로 노열에 묶여 있었다. 동맹군의 위업은 항복한 터키 함대로부터 얻은 15,000명에 가까운 기독교도 갤리선 노예들의 해방이었다. 여러 역사가들은 이 승리가 유럽을 기독교왕국으로 보존시켰다고 주장한다.

레판토해전 이후 군함으로서의 갤리선은 그 중요성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루이14세(1643-1715) 통치하의 프랑스는 초호화판으로 설비된 몇 척의 갤리선을 더 건조하였는데 이는 주로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의 장교들에게 전통적인 갑판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갤리선은 1749년 까지 프랑스 해군에 남아 있었다. 우표위에 나타난 갤리선은 1680년도의 ‘La Reale’ 이며 프랑스 왕실 해군의 배임을 나타낸다.-실제 이름이 아니고 그 당시 프랑스 함대의 모든 기함에 나타난 이름이다.(그리고 레판토 해전 당시의 돈주앙의 초기‘Reale’과 혼동하지 않기 바란다.)

이 두 장의 우표에서도 증명되듯이 스웨덴과 러시아의 군대가 조우한 전투에서도 갤리선이 있었다.

이 얕은 흘수를 지닌 길고 날씬한 선박은 울퉁불퉁한 피요르드 해안을 항해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피터대왕은 1704년 터키식의 갤리선을 건조한 최초의 인물이며 1712년 스웨덴이 뒤를 이었다.1760년 스톡홀름의 조선소에서 시작하여 우표에 나타난 ‘Uusimaa’타입은 길이37m 넓이9m 흘수2.5m의 모습을 드러냈다. 각각의 측면에는 20쌍의 노가 있었고 사각형의 돛이 세워졌으며 120명의 승무원이 있었다.

이 러시아의 기념우표시트는 1714년에 있었던 핀랜드의 해안에서 떨어진 전투의 275번째 기념일을 기념한다. 스웨덴과 러시아는 발틱해에서의 첫 갤리선 전투인 이 전투에서 맞부딪쳤고 결과는 러시아의 승리로 돌아갔다. 우측상단에 ‘러시아 황실 해군의 아버지’ 피터 대왕의 모습이 보인다.


터키우표에 15세기의 유물이자 전세계에 단 하나 남아있는 갤리선 ‘Kadirga’가 묘사되어 있다. 이스탄불의 해군박물관에서의 전시를 위해 돛대를 제거시켜야 했다. 제원: 길이 37m, 폭 6m, 흘수2m, 배수량 140ton, 노 24개, 각 노는 세명의 사람이 저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