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이사부 세미나 - Ⅰ(이청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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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등록일 | 2002-07-01 | |||
| 다운로드 | 海洋開拓의 先驅者 新羅 將軍 異斯夫.hw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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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해양진출의 시대이며 바다는 21세기 인류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될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바다를 지배하는 국가가 21세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국가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기에 오랜 옛날에 바다를 호령했던 위인들의 활약상을 살펴보는 것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새로운 개척 정신을 일깨워 주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 그 중의 한 인물로서 新羅 智證王 때 지금의 울릉도인 于山國을 정벌하였던 新羅 將軍 異斯夫와 그의 울릉도 정벌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해양개척 정신을 일깨워 주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新羅將軍 異斯夫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랫말로 우리에게 친근한 異斯夫는 『三國史記』 新羅 本紀와 列傳의 기록에 의하면 新羅 奈勿王의 4세손으로, 高句麗·百濟보다 후진적이었던 新羅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던 智證王, 法興王, 眞興王 3대에 걸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정치, 군사, 학문 등 다방면에 걸쳐서 크게 활약한 정치가요 군사전략가요 학자이다. 『三國史記』 智證王 6년(505)조에 보면 "봄 2월에 왕이 친히 나라 안의 州·郡·縣을 정하고 悉直州(지금의 三陟)를 두어 異斯夫로서 軍主를 삼았는데 軍主의 이름은 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異斯夫가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列傳에 의하면 ".....(前略)..... 智度路王(智證王)때에 연해변의 관리가 되었다. 그는 居道가 마련한 馬叔놀이〔列傳 異斯夫傳 바로 앞에 실려 있는 居道傳에 보면 이 놀이로 군사를 훈련하여 于尸山國(지금의 蔚山)과 居柒山國(지금의 東萊)을 멸망시켰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기마 전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로써 加耶國을 빼앗고 동 왕 13년에는 何瑟羅州(지금의 江陵)의 軍主가 되어 于山國을 아우르려고 도모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 내용을 보고 智證王 6년에서 13년 사이의 어느 기간동안에 異斯夫가 다시 加耶 방면의 관리로 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문맥이나 기간 등을 고려하여 볼 때, 悉直州의 軍主로 있는 동안 왕명에 의하여 加耶 지방을 공략한 것으로 이해되며 혹 당시 悉直 지방민들의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훈련된, 숙달된 水軍을 이끌고 加耶 근해에까지 이르렀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于山國 정벌에 성공한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어서 智證王 13년(512)조에 "여름 6월에 于山國이 귀순 복종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하였다. 于山國은 溟州(지금의 江陵)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혹은 울릉도라고도 한다. .....(中略)..... 伊 異斯夫가 何瑟羅州(지금의 江陵)의 軍主가 되자 于山國 사람들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위세로써는 굴복시키기 어려우나 꾀로써 항복시킬 수 있다하여,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中略).... 그 나라 사람들이 무서워서 곧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이때부터 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인 독도가 우리의 정식 영토로 편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이 모두가 異斯夫 將軍의 빛나는 해양개척의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一然이 쓴 『三國遺事』에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그 주인공이 伊 朴伊宗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列傳에 나오는 異斯夫의 또 다른 표현인 苔宗의 방언적 표현을 한자음을 빌려 나타낸 것일 뿐이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일본이 이처럼 엄연한 역사적 기록을 무시하면서까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국제관계상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며 오히려 국가적 망신을 초래할 수 있는 추태라 하겠다. 于山國 정벌 기사를 끝으로 한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던 異斯夫가 다시금 모습을 나타낸 것은 眞興王 2년(541)의 일로 『三國史記』에 의하면 "異斯夫를 임명하여 兵部令으로 삼아 중앙과 지방의 군사 사무를 맡겼다."고 하였으니 당시의 兵部令은 兵部의 책임자로 兵權 뿐만 아니라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요직이었다. 이어서 眞興王 6년(545)에는 "왕에게 『國史』의 편찬을 상주하니 왕이 진정으로 그렇게 여겨 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모아 그들에게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어서 眞興王 11년(550)에는 "百濟가 高句麗의 道薩城(지금의 天安)을 함락시키자 高句麗는 百濟의 金峴城(지금의 충남 全義)을 함락시켰다. 이에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서 異斯夫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무찌르게 하고 두 성을 빼앗아 더 늘려 쌓아 군사 1천을 머물러 두고 이를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異斯夫가 등장하는 金石文 기록으로는 1978년 정월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남한강 연안의 丹陽 지방에서 발견된 丹陽赤城新羅碑에 나타나고 있는데 비문에 따르면 "喙部伊史夫智伊干"으로 비문의 맨 처음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한자표기는 다르지만 『三國史記』에 나오는 伊 異斯夫가 틀림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丹陽赤城新羅碑는 新羅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異斯夫는 新羅가 영토 확장 정책을 펼 때 그 선도적 역할을 맡음으로써 후일 新羅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는데 공헌한 인물이다. 혹자는 비의 건립 시기를 眞興王 10년(549)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소견으로는 비문에 나오는 金庾信의 할아버지인 武力의 바로 앞에 나오는 阿干(新羅 의 관등 중 6위인 阿 ) 比次夫의 관등이 『三國史記』 居柒夫傳에 의하면 新羅가 高句麗를 쳐서 竹嶺 이북의 10郡을 빼앗던 해인 眞興王 12년(551)에는 그보다 한 단계 위인 大阿 으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이전의 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확실한 연대를 파악할 근거는 없는 실정이다. 이는 아마도 眞興王 11년(550)에 공취한 道薩城과 金峴城의 위치에 비하여 丹陽의 위치가 훨씬 新羅 쪽에 가깝다는 점에서 추정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異斯夫에 관한 마지막 역사 기록으로는 眞興王 23년(562)의 기사로 "9월에 加耶가 배반했으므로 왕이 異斯夫에게 명하여 이를 치게 하고 斯多含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中略)..... 異斯夫가 군사를 이끌고 치니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加耶 聯盟 중 마지막까지 남았던 大加耶를 정복함으로써 新羅가 낙동강 유역을 모두 확보하는데도 공헌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異斯夫가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던 悉直州의 軍主가 된 때의 나이를 비교적 이른 시기인 20대 중반쯤으로 가정하더라도 이 때는 나이가 80대에 달한다고 하여 기록의 오류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三國史記』 列傳 斯多含傳에도 伊 異斯夫가 元帥로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加耶의 국경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류는 아닐 것이라 사료된다. 이 기사를 끝으로 異斯夫에 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史書에는 물론 眞興王의 재위 20년대 말에 세워진 眞興王巡狩碑에도 그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고 대신 異斯夫의 뒤를 이어 크게 활약한 居柒夫의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異斯夫는 眞興王 재위 20년대 중·후반쯤에 은퇴하였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의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대부분 異斯夫를 친왕적인 인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는 아마도 『三國史記』에 보이는 그에 관한 기록을 일반적으로 이해한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필자의 소견은 이러한 견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렇게 생각되는 까닭으로 먼저 異斯夫가 활약한 시기의 전반부의 임금인 智證王의 즉위 과정이 정상적인 궤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智證王은 정상적인 즉위 과정과는 달리 모종의 조치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訥祗王 연간의 癸未年(443년)이나 智證王 연간의 癸未年(503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智證王 즉위 당시의 나이로 미루어 볼 때 503년에 세워졌을 것이 유력한 迎日冷水里新羅碑에 『三國史記』에 이미 500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오는 智證王이 정식 왕이 아닌 葛文王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 『三國史記』 新羅 本紀 智證麻立干 기사에 즉위 당시의 나이가 64세나 되었다는 점 그리고 선왕인 照知王(炤知王)의 再從弟라고 한 점등으로 미루어 볼 때 智證王의 왕위 계승은 정상적인 궤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견을 뒷받침하는 견해로 경북대의 朱甫暾은 奈勿王系 내부의 가계 대립이 정치적인 대립으로 나타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바로 奈勿王의 傍系인 智證王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直系인 炤知王을 내몰고 즉위하면서부터였다고 본 바 있다. 異斯夫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反智證王 계열에 속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三國史記』 列傳 異斯夫傳을 보면 奈勿王의 4세손이라는 것 밖에는 그의 가계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데 이것은 최고위 관직인 兵部令을 역임한 異斯夫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준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智證王 때의 異斯夫의 부임지와 활동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중앙에서 활약한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고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外職으로만 전전하면서 주로 加耶 정벌, 于山國 정벌 등의 군사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혹시 異斯夫가 奈勿王의 직계였거나 또 다른 방계의 인물로서 왕위 쟁탈전에서 智證王系에게 패하였지만 異斯夫 가문의 정치적 위상을 고려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물론 이러한 소견은 異斯夫가 주로 군사를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는 많은 반대 의견에 배치되지만 중앙에 남아있는 異斯夫와 연계된 세력과의 단절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을 나름대로 면밀히 살펴본 결과에 따른 필자의 소견이다. 왜냐하면 앞 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智證王 13년(512) 6월의 于山國 정벌에 관한 기록을 끝으로 우리의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眞興王 2년 (541) 3월에 伊 으로서 兵部令의 자리에 올라 內外兵馬事를 관장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기까지 무려 29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에 대한 기록을 전혀 볼 수가 없는데 그 시기가 바로 智證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율령의 반포,불교의 수용 등 일련의 정책으로 왕권의 강화에 주력하였던 法興王 연간에 해당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우리측 기록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異斯夫에 대하여 『日本書紀』 17권 繼體紀 23년 조에 "新羅의 上臣 異斯夫가 加耶 지역을 공략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는 法興王 16년(529)의 일로 그 기사의 일부를 옮겨보면 "由是新羅改遣其上臣伊叱夫禮智干岐....."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日本書紀』의 伊叱夫가 異斯夫가 틀림없는가하는 문제가 따르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異斯夫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은 바로 그 시기가 法興王 16년이라는 점이다. 그 까닭은 이 시기가 바로 法興王 때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추진된 불교의 수용을 위하여, 왕권의 강화를 저지하려던 보수 귀족세력의 사상적 근거지이자 新羅 토착 종교의 대표적인 神聖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天鏡林에 사찰을 창건하려다가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심지어 폐위에까지 이를 정도의 심각한 상황에 몰리자 측근인 異次頓을 희생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로써 그 난국을 타개하리 만치 法興王이 정치적 위기를 맞았던 때였다는 점이다. 『三國史記』에 보면 智證王은 習寶 葛文王의 아들이라고 했으며, 『三國遺事』 興法篇에는 異次頓의 할아버지가 習寶 葛文王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法興王과 異次頓의 관계는 숙질관계가 된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智證王이 64세에 즉위하여 재위 15년에 죽었다고 했으니 智證王의 맏아들로 그 뒤를 이은 法興王도 상당한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데, 異次頓이 순교하였다고 하는 法興王 14년(527)에 異次頓의 나이가 26세였다고 한 『三國遺事』의 기록으로 보아 이러한 추정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추정으로 미루어 볼 때 異次頓의 죽음은 단순히 순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근친인 法興王의 왕권 강화에 적극 협력하다 보수 귀족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봉착한 나머지 폐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이 天鏡林 創寺와 맞물려 불교를 위하여 순교한 것으로 각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기록의 신빙성 여부는 차지하고라도 法興王 연간에는 異斯夫가 정치에서 상당히 배제되고 있었음을 보다 강력히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바로 法興王 11년(524)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蔚珍鳳坪新羅碑가 그것이다. 蔚珍鳳坪新羅碑에는 牟卽智 寐錦王(法興王), 徙夫智 葛文王(立宗 葛文王)을 비롯하여 당시 국정 운영을 주도하던 주요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다고 보여지는데, 만약 異斯夫가 당시에 정치에 관여하였다면 40대 중·후반의 나이로 奈勿王 4世孫이라는 출신 가계, 智證王代 영토 확장 과정에서의 업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개인적인 지모 등 어느 모로 보더라도 당시 귀족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올라있었으리라 추정하여도 큰 흠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아 비문에 당연히 그 이름이 올라야 할 터이다. 그러나 같은 奈勿王 4世孫으로 보다 고위 관등을 지녔을 異斯夫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뒤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居柒夫傳에 居柒夫의 아버지로 나오는 伊 勿力과 동일인으로 보이는 勿力智가 一吉干支로 異斯夫 대신에 喙部를 대표해서 그 자리에 올라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점이 바로 法興王 당시의 오랜 기간동안 異斯夫가 정치에서 배제되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설사 蔚珍鳳坪新羅碑가 단지 특정 사안에 따라 그 사안에 관련된 인물들만 소집된 것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異斯夫는 일찍이 悉直州(지금의 三陟)의 軍主와 何瑟羅州(지금의 江陵)의 軍主를 두루 역임하면서 문제의 蔚珍지역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그 지역 사정에 대해서는 중앙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異斯夫가 法興王代(514∼540) 국정 운영의 중심부에서 소외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답이 바로 異斯夫가 反智證王 계열의 핵심 인물로 보수적 귀족 세력의 입장에서 法興王의 왕권 강화에 반대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각되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급진적으로 추진되던 天鏡林 創寺가 귀족 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면서 異次頓이 숙청되고 보수적 귀족 세력의 입지가 강화되는 한편 法興王도 이들과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정국 운영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시 異斯夫가 등용되어 활동하였던 것이 『日本書紀』에 기록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쨌든 정계를 떠났던 異斯夫가 다시 복귀한 것은 眞興王 때의 일로 전술한 바와 같이 眞興王 2년 (541) 3월에 伊 으로서 兵部令의 자리에 올라 內外兵馬事를 관장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는 바로 왕권이 가장 취약했던 시기이며 상대적으로 귀족 세력이 강성하였던 때였다. 眞興王 元年(540) 조에 "大赦令이 내려지고 文武官의 관작을 한 급씩 올려주었다"고 한 것이 그 증거이다. 왕이 즉위하면 민심의 안정을 위해 大赦令이 내려지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지만 文武官의 관작을 한 급씩 올려주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로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인한 귀족 세력과의 타협에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三國史記』에는 眞興王이 7세에 즉위하였다고 하였으며, 『三國遺事』에는 15세에 즉위하였다고 하여 서로 차이가 있으나 왕의 연소함으로 말미암아 왕권이 약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하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異斯夫가 兵部令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異斯夫의 정치적 위상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法興王이 죽고 어린 眞興王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취약해진 상황에서 보수적 귀족세력의 대표자인 異斯夫가 兵部令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귀족 세력이 강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三國史記』 職官志 上에 眞興王 5년(544)에 兵部令 1인을 증원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內外兵馬事를 장악한 異斯夫에 대한 견제의 의미라고 파악되며 이러한 사실은 바로 異斯夫가 反智證王 계열에 서있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異斯夫의 정치적 성격을 말해주는 또 다른 사실로 眞興王 6년 異斯夫의 상주에 따른 {國史}의 편찬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작 眞興王이 {國史} 편찬의 적임자로 선택한 것은 異斯夫가 아닌 居柒夫였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國史 편찬의 필요성을 상주한 사람이 異斯夫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실질적으로 居柒夫보다는 異斯夫가 더 {國史} 편찬의 적임자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편찬의 책임자로 異斯夫가 아닌 居柒夫를 택했다는 것은 異斯夫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세력이나 귀족 중심의 편찬 의도를 막으려는 조치였다고 보아 큰 무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居柒夫의 가계부터 살펴보자. 『三國史記』 居柒夫傳에 의하면 그의 父를 伊 勿力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法興王 11년(524)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蔚珍鳳坪新羅碑에 나오는 勿力智 一吉干支가 居柒夫의 父인 勿力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蔚珍鳳坪新羅碑에 나오는 勿力智 一吉干支는 비록 관등은 一吉干支에 불과하지만 牟卽智 寐錦王, 徙夫智 葛文王과 함께 敎事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喙部로 표기된 인물 중 寐錦王을 제외하면 最高 관등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 居柒夫傳에는 居柒夫의 父 勿力의 관등이 伊 이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法興王 11년 一吉干支였던 勿力이 왕의 측근으로 머무르면서 계속 승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居柒夫의 가계가 祖父인 乃宿 角干, 父인 勿力 伊 으로 이어지는 當代 最高의 貴族家門으로서 친왕적 세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다시 『三國史記』 居柒夫傳을 보면, 居柒夫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서 사방으로 유람하다가 高句麗로 가서 惠亮 法師로부터 불법을 배웠다고 하였다. 그 시기는 바로 法興王 연간으로 보인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바 대로 法興王의 佛敎振興政策에 대한 당시 귀족세력들의 반대 입장은 매우 강경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當代의 名門貴族 출신인 居柒夫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가계가 친왕적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眞興王이 {國史} 편찬의 적임자로 異斯夫가 아닌 居柒夫를 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眞興王의 의도대로 {國史}를 편찬한 居柒夫는 그 공적으로 波珍 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眞興王의 측근으로서 정치, 군사,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활약하였고 마침내 眞智王 원년에는 上大等에 임명되어 軍國 政事를 관장하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國史} 편찬의 필요성을 상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居柒夫보다는 더 {國史} 편찬의 적임자였을 異斯夫를 제치고 居柒夫가 {國史} 편찬의 王命을 받은 것도 異斯夫의 정치적 입지가 反智證王 계열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異斯夫는 젊은 나이에 悉直州의 軍主와 何瑟羅州의 軍主를 거치는 동안 加耶의 공략과 于山國 정벌이라는 무공을 세울 만큼 뛰어난 군사 전략가요 군인이었다. 특히 居道의 故事를 활용하여 加耶를 정복하고 于山國 정벌에서는 木獅子를 활용하는 전술을 쓸 만큼 뛰어난 지략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反智證王系的 입장에 섰던 결과 智證王의 뒤를 이어 즉위한 法興王이 왕권의 강화와 이를 위한 불교진흥정책을 추진하던 中年 동안에는 정치에서 배제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眞興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왕권이 다소 약화된 노년에는 마침내 정치 일선에 복귀하여 兵部令으로서 內外兵馬事 즉 軍國事務를 관장하는 최고의 관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어서『國史』의 편찬을 상주하기도 하였다. 이러는 동안 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兵部令의 증원, 그의 정치적 성향을 염려한 眞興王의 뜻에 따른 居柒夫에 의한 {國史} 편찬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異斯夫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이러한 정치적 입장에서의 면모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미 1500년 전에 동해안의 해상 세력을 이끌고 거친 바다를 건너 于山國을 정벌함으로써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해양을 개척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개척과 도전 정신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21세기를 이끌어 갈 우리 세대가 異斯夫에게서 배우고 실천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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