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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세미나 - Ⅱ(이규대)

제목 이사부 세미나 - Ⅱ(이규대)
글쓴이 등록일 200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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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北方進出과 異斯夫의 于山國 服屬



이 규 대

(강릉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1. 동해안 지역의 영속관계


최근에 이르면서 동해안 지역에서는 괄목할만한 발굴성과를 이어 내고 있다. 이러한 발굴성과는 고대사회 초기의 이 지역의 사회상을 규명하는데 실증적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발굴성과는 문헌자료의 내용과 연계하여 파악할 때 그 실증성이 제고될 수 있다. 고대사회 초기의 동해안 지역에 대한 문헌자료의 내용은 매우 빈약하고 단편적이다. 이러한 한계는 그간에 발굴성과에 힘입어 일정하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고대사회의 동해안 지역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 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등에서 관련된 기사를 발췌하여 이 지역의 領屬관계를 개관해 보고자 한다.

① 江原道 : 본래 濊貊의 지역인데, 후에 고구려와 신라의 소유가 되었다. --, *.
② 江陵大都護府 : 본래 濊國이다. 漢나라 武帝가 元封 2년(B.C. 109)에 장수를 보내 右渠를 토벌하고 四郡을 정할 때에 臨屯이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河西良이라 하였고, 河瑟羅라고도 하였다. 신라 善德王은 小京을 설치하고 仕臣을 두었다. 武烈王 5년(658)에 이 지역이 靺鞨과 연접하였다 하여 小京을 고쳐 州로 만들고 都督을 두어서 鎭守케하였고, 景德王 16년(757)에 (河西州)를 溟州라 고쳤다. -- 《세》惠恭王 12년(776) 復古하였다.
③ 三陟都護府 : 본래 悉直國이다. 신라 婆娑王 때에 항복하였고, 智證王 6년(505)에 (州로 삼아) 悉直軍主를 두었고, 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郡으로 삼았다. 《여》州는 옛 悉直氏의 나라이다. 漢나라 永元 14년 신라 婆娑王 23년(102) 壬寅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梁나라 天監 4년 智證王 6년 乙酉에 처음으로 悉直州 를 설치하고 金異斯夫를 軍主로 삼았다. 唐나라 乾元 2년 景德王 19년(760) 乙亥에 三陟郡으로 고치고, 혹 이르기를 唐나라 貞觀 중에 신라 善德王이 眞珠都督府를 두었다고 한다. *.
④ 襄陽都護府 : 본래 고구려 翼峴縣인데, 伊文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翼嶺이라 고쳐서 守城軍 領縣으로 만들었다. --.*.
⑤ 平海郡 : 본래 고구려 斤乙於이다. --. *.
⑥ 杆城郡 : 본래 고구려의  城郡인데, 加羅忽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守城軍으로 고쳤다. --. *.
⑦ 高城郡 : 본래 고구려의 達忽이다. 신라 眞興王 29년(568)에 達忽州로 삼고 軍主를 두었다. 景德王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郡으로 삼았다. --. *.
⑧ 通川郡 : 본래 고구려의 休壤郡인데, 金惱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金壤郡으로 고쳤다. --. *.
⑨ 蔚珍縣 : 본래 고구려의 于珍也縣인데, 古 伊郡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郡을 삼았다. 여》本縣은 옛 濊貊의 땅이다. 후에 고구려 소유가 되었는데 비로소 于珍 혹은 波朝 혹은 古于伊이라 이름하였다. 신라 文武王과 唐나라 장수 李世勣이 고구려를 攻滅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이름을 蔚珍으로 고치고 郡으로 삼았다. *.
⑩  谷縣 : 본래 고구려의 習比谷縣이다. 신라 때에 習磎로 고쳐서 金壤郡 領縣으로 하였다. --. *.
(위의 내용은《신증동국여지승람》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여》는《여지도서》이고 《세》는《세종실록지리지》이며, 기호 -- 는《여지도서》와 동일함을, 기호 * 는《세종실록지리지》와 동일함을 의미한다.)


위의 기사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동해안 지역의 9개 지방이 모두 古號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울진은 우진야이고, 고성은 달홀이고, 양양은 익현이다. 이러한 邑號는 그 지역에 일정하게 세력권이 형성되어 공동체적 삶이 영위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동해안 지역에는 상당히 많은 세력권이 형성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권은 적어도 삼국의 태동기 이전시기로부터 파악되고 있다. 예컨대 예국과 실직국은 삼국의 태동 이전부터 강릉과 삼척지방에 형성되었던 세력권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각 지방의 고호는 몇 개씩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강릉지방이 예국, 하서랑, 하슬라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읍호가 改號 즉 변경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읍호의 변경은 단순한 개칭이 아니라 일정하게 사회변동에 수반되는 것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최근에 都·農統合이라는 사회변화로 명주군이 강릉시로 변경된 것은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이로서 읍호의 변경은 사회의 내부변화가 일정하게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이렇듯 동해안 지역에서는 읍호에서 시사되듯 적어도 삼국의 태동기 이전부터 공동체적 삶을 기반으로 각 지방에는 일정한 세력권이 형성되어 있었고, 읍호의 변경에서 시사되듯 사회의 내부변화에 기초하여 세력권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같은 세력권은 예국·실직국·우산국 등에서 보듯 이릉바 '小國'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들은 사회발전 단계에서 고대국가 이전단계로서 '읍락사회'·'군장국가'·'성읍국가'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동해안 지역의 각 지방이 모두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해안 지역이 이처럼 고구려에 領屬되는 시기는 건국초기인 太祖王(53∼146) 때부터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설정은 고구려가 漢四郡을 축출하면서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②에서 강릉지방의 예국이 한사군의 臨屯郡으로 편제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이로부터 이곳은 임둔군이 폐지된 후에는 玄 
郡으로 편입되었고, 현토군이 서북쪽으로 이동해 간 뒤에는 樂浪郡에 편입되어 그 하급관청인 東部都尉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30년경 동해안 지역은 낙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를 얻었고, 이후 沃沮와 東濊가 고구려에 복속되는 시기에 동해안 지역도 함께 복속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동해안 지역의 각 지방은 고구려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시기에 이미 고구려로 영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倭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도와 伽倻연맹에까지 군사를 파병했던 광개토왕(391∼413) 대에서는 강원도 남부지역까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편제·지배형태의 구체적 양상은 분명치 않다. 다만 적어도 5세기에 이르기까지 중앙으로부터 동해안 지역에 지방장관이 파견되었다는 기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각 지방은 일정하게 독자적 세력권이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내적으로 소국들 사이에 영속관계가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동해안 지역이 고구려에 이어 신라에 영속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울진·평해로부터 통천·흡곡에 이르기까지 전역이 신라로 영속되고 있다. 이러한 영속관계의 변화는 이 지역이 양국간의 爭處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③에서 삼척지방이 婆娑王 23년(102)에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나 분명치 않다. 이후 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悉直과 何瑟羅에서 양국간의 항쟁이 몇 차례 있었다. 즉 奈勿王 40년(395) 파병하여 北邊을 침입한 靺鞨을 悉直原에서 격파하였고, 訥祗王 34년(450) 하슬라 城主 三直이 출병하여 悉直原에서 사냥하는 고구려의 邊將을 살해하였고, 慈悲王 11년(468)에는 고구려가 靺鞨과 더불어 悉直城을 습격하였고, 이 시기에 泥河城이 축성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하슬라와 실직이 양국간에 쟁처가 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양상은 5세기 말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어 智證王 6년(505)에 悉直州를 편제하고 軍主를 파견하였고, 동왕 12년(511)에는 강릉지방을 何瑟羅州로 편제하고 군주를 파견하였다. 실직주가 설치되고 여기에 군주가 파견된 것은 신라의 중앙으로부터 지방장관이 파견된 첫 번째 사례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로서 신라의 북방진출은 6세기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③에서 善德女王 8년(639)에 강릉지방을 小京으로 편제하고 仕臣을 파견하였고, ⑦에서 고성지방이 眞興王 29년(568)에 達忽州로 편제되고 군주가 파견된 데서 뒷받침된다.

이상에서 살핀바와 같이 동해안 지역은 청동기와 철기시대에 이르면서 일정하게 독자적 세력을 이루면서 공동체적 질서를 갖춘 세력권을 형성하여 '小國'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소국들의 영속관계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삼국의 태동기에 고구려에 영속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영속된 이후에도 각 지방의 세력권은 일정하게 유지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4∼5세기에는 신라와 고구려·말갈의 쟁처가 되었으며, 6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라의 영토로 편제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2. 신라의 북방진출과 실직·하슬라주


삼국은 고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면서 밖으로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로부터 삼국의 항쟁이 비롯되었다. 고구려·백제보다 후진적이었던 신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한 것은 6세기에 들어선 智證王(500∼514) 때부터였다. 이 때 신라는 농사를 적극 권장하여 牛耕을 시작하고 水利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임으로서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國號를 '新羅'로 정하고 王號를 麻立干에서 중국인 '王'으로 바꾸었으며, 州郡制度를 정비하고 원시적인 풍습인 殉葬을 금하여 체제를 정비해 갔다. 이렇듯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체제정비는 法興王(514∼540)대로 이어져 강화되면서 신라는 대외 팽창정책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신라의 팽창정책은 내부발전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신라의 북방진출은 두 개의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하나는 내륙지방으로 진출이다. 이 방면은 일찍부터 고구려가 남하하였던 통로로서 廣州·忠州·鳥嶺·聞慶·尙州·善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방면의 요충은 鳥嶺과 竹嶺이었다. 즉 죽령은 永川-義城-安東-榮州-豊基를 거쳐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東路의 관문이었고, 永川-大邱-善山-尙州-店村-聞慶을 거쳐 忠州로 이어지는 西路로의 관문은 조령이었다. '中原高句麗碑'와 '丹陽赤城碑'는 신라의 북방진출과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이 루트를 통해 추진되었음을 상징하는 유적이라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동해안으로의 진출이었다. 이 방면의 진출은 내륙지방의 東路 즉 죽령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또한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증왕 5년(504)에 동해안 일대에 12城을 쌓고 이어서 삼척지방에 실직주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북방진출이 비중을 갖고 있었음을 의한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 방면의 진출은 陸路와 海路가 함께 이용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내물왕 40년(395)에 실직원에 군대를 파견하고, 지증왕 6년(505)에 이사부를 군주로 삼아 실직주에 파견하였고, 동왕 12년(511)에 하슬라주를 설치하고 군주를 파견하였다. 법흥왕 11년(524) '蔚珍鳳坪新羅碑'가 건립되었다. 진흥왕 17년(556) 7월에는 安邊에 比列忽州(일명 碑利城)가 설치하고 沙成宗으로 軍主를 삼았고, 동왕 29년(568)에는 비열홀주를 폐하고 達忽州(고성)를 두었다.

또한 이 시기에 咸南 咸興郡 소재의 黃草嶺(일명 草坊院)碑와 咸南 利原郡 소재의 磨雲嶺碑가 각각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례에서 울진-삼척-강릉-고성-안변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북방진출을 살필 수 있으며, 이 방면의 진출은 육로와 해로가 함께 이용되었을 것이고, 이점은 이사부의 울릉도 服屬에서 시사되는 바이다.

이렇듯 6세기 전반 신라의 북방진출은 실직을 거점으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지증왕 5년 동해안 일대에 12개의 성을 축성한 이듬해인 동왕 6년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처음으로 군주가 파견된 것은 이곳이 북방진출의 거점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실직주의 확보는 자비왕 11년(468) 이래 고구려 장수왕에게 점령되었던 이곳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실직에 설치되었던 州治는 하슬라로 옮겨졌다. 즉 지증왕 12년(511)의 하슬라주가 설치되었고 이사부는 실직 군주에서 하슬라 군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이로서 실직주가 설치된 지 6년 만에 신라 북방진출의 거점이 하슬라주로 옮겨졌으며, 이후 이곳을 거점으로 북방진출이 도모되면서 진흥왕대에는 안변을 거쳐 함경남도의 함흥과 이원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그것은 적어도 진흥왕 29년(568) 이전의 어느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볼 때, 실직과 하슬라가 6세기 전반 신라의 북방진출에 거점도시가 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실직과 하슬라의 이러한 역할은 동해안 일대에서 그 지리적 조건을 포함하는 정치·군사·문화적으로 중심적 위상을 확보하였던 데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눌지왕 34년(450) 고구려의 邊將이 悉直原에서 사냥을 할 때 하슬라 城主 三直이 출병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하슬라 성주의 자의적인 군사활동으로 그것을 수행할 정도의 독자성을 갖추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독자성이 실직과 하슬라가 갖는 동해안 일대의 중심적 위상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地理志에 의하면, 신라에서 溟州는 旌善縣·棟 縣(?)·支山縣(연곡)·洞山縣 등을 領縣으로 두었고, 三陟郡은 竹嶺縣(?)·滿卿縣(?)·羽溪縣·海利縣 등을 領縣으로 두어 각각 4개의 屬縣을 두었다. 이러한 양상은 동해안 지역의 여타 지방이 1∼2개의 속현을 둔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상대적으로 실직과 하슬라가 큰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이를 토대로 정치·군사·문화적 위상이 확보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신라가 이곳에 하슬라주를 설치하고 군주를 파견한 것도 하슬라의 이러한 역량과 위상에 기반을 둔 것이었고, 그리고 선덕여왕 8년(639)에 강릉에 小京을 설치하고 그 장관인 仕臣을 두었던 것도 이러한 데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신라의 북방진출은 실직과 하슬라를 거점으로 추진되었다. 6세기 전반 이곳에 주를 설치하면서 비롯된 북방진출은 이곳이 동해안 지역의 정치·군사·문화적 거점이었던 데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신라는 실직에 주를 설치한 지 6년 만에 하슬라로 주치를 옮김으로서 이곳의 역량을 결집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북방진출을 도모함으로서 진흥왕 대에 이르러서는 함흥평야 일대를 확보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7세기 중반에 이르러 하슬라가 소경으로 승격되는 것도 이러한 지정학적 위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3.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6세기에 접어들면서 비롯되는 신라의 북방진출에서 실직과 하슬라가 그 거점도시가 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직과 하슬라가 확보하였던 독자적 역량과 위상 즉 동해안 일대에서 정치·군사·문화적 중심적 위상에 토대를 둔 것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실직과 하슬라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라 북방진출의 주역은 이사부였다. 그는 지증왕 6년(505) 실직주 군주로 부임하였고, 동왕 12년(511)에 州治를 하슬라주로 이곳의 역량을 결집시킨 장본인도 이사부였다. 결국 그는 적어도 6년 이상을 이곳의 군주로 머물면서 신라의 북방진출을 도모하였다. 6세기 중반에 이르러 진흥왕의 순수비로 상징되는 이곳 동북방의 강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사부의 활약에 토대를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다음 자료에 의해 이사부의 인적사항과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하여 우산국 복속의 의미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智證麻立干 13년 6월.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 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 不服 伊 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獅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여 해마다 특산물로 조공(朝貢)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 정동 쪽에 있는 해도인데 혹 울릉도라고 하며 땅은 사방 백 리이고 지형이 험하다는 것만 믿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이찬(伊 )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엄만으로는 우산국 사람들을 육지로 나오게 하기 어려우니, 꾀로서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여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눠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너희를 밟아 죽이게 할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위협하니, 우산국 사람들이 겁내어 바로 항복하였다.
㉯.《三國史記》권 44, 列傳 4, 異斯夫.
異斯夫(或云苔宗) 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誤伽倻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何瑟羅州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獅子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其人恐懼則降 眞興王在位十一年 大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異斯夫出兵 擊之取二城 增築留甲士戌之 時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이사부(혹 태종(苔宗)이라고도 함)는 성(姓)이 김씨(金氏)이며, 내물왕(奈勿王)의 4세손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때에 바닷가 지방의 관원이 되어 거도(居道)의 권모(權謀)를 물려받아 말놀음으로써 가야국을 속여 이를 쳐서 빼앗았다.
13년 임진(壬辰)(512)에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을 합치려 도모하였다. 말하기를 그 나라 사람은 어리석고 사나워서 위력으로 항복 받기 어려우니 꾀로서 굴복시키겠다고 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의 해안에 이르러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일 것이다." 하니, 그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진흥왕 11년 대보(大寶) 원년에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진흥왕은 양국의 병사들이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출병을 명하였다. 이사부는 공격하여 두 성을 탈취하여 증축하고 갑사로 지키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가 병사를 파견하여 금현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감에 이사부가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三國遺事》권 1, 智哲老王.
又阿瑟羅州 東海中便風二日程 有于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 朴伊宗 將兵討之 宗作木偶獅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또 하슬라주(溟州)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가 있다. 이 섬은 둘레가 2만6천7백3십 보(步)이다. 이 섬 속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을 바쳐오지 않았다. 이에 왕은 이찬(伊 )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케 했다. 이때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배에 싣고 가서 위협했다.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버리겠다. 이에 오랑캐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이에 박이종을 포상하고 주백(州伯)으로 삼았다.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眞興王 2년 3월.
이사부로 병부령(兵部令)을 삼아 中外의 兵馬事를 맡게 하였다.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眞興王 6년 7월.
伊  異斯夫가 아뢰기를 "國史란 것은 君臣의 善惡을 기록하여 褒貶을 萬代에 보이는 것이니, 史記를 꾸미어 두지 아니하면 後世에서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하매, 왕이 그러이 여기어 大阿  居柒夫 등을 명하여 널리 文士를 모아 國史를 꾸미게 하였다.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眞興王 23년 9월.
伽倻가 叛하매 왕이 異斯夫를 명하여 칠새 斯多含이 그를 돕게 되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 <강릉대도호부> 이사부(異斯夫) : 내물왕(奈勿王)의 4대 손(孫)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때에 하슬라(何瑟羅) 군주(軍主)로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합병하기로 꾀하였다. 그 나라 사람이 어리석으나,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 받기는 어려우니, 계략으로써 항복 받는 것이 옳다하여, 나무로 가짜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가서 속이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놓아서 밟아 죽이겠다."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울진현> 우산도(于山島)·울릉도(鬱陵島) :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 머리의 수목과 산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일설에는 우산·울릉이 원래 한 섬으로서 지방이 백 리라고 한다. 신라 때에 험함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는데 지증왕(智證王) 12년에 이사부(異斯夫)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于山國) 사람들은 미욱하고 사나우니 위엄으로 항복하기 어렵고, 계교로 복종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전함(戰艦)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猛獸)들을 놓아서 밟아 죽이리라"하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삼척도호부> 이사부 : 지증왕 6년에 이 고을 군주가 되었다.

이상의 자료는《삼국사기》,《삼국유사》,《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발췌하였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이사부의 인적 사항이다. ㉯에서 이사부의 姓은 金氏이고 奈勿王의 4세손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에서는 이찬 박이종이 소개되고 있는 바, 그의 행적으로 보아 이사부와 혼동이 야기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양자가 동일인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으며, 다만 전자에 비중을 두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사부는 관등이 伊 에 올랐다.

즉 이찬이라는 官等으로 軍主라는 官職에 임명되었다. 官階로 볼 때, 이찬은 신라의 17官等에서 伊伐 에 이어 제2관등이다. 이로서 그는 제2관등 이찬에 올랐던 진골 귀족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다음으로 이사부의 행적을 정리하면,
· 지증왕 초년에 沿邊官이 되어 居道의 권모를 이어받아 馬戱로서 가야국을 攻取하였고,
· 지증왕 6년(505) 실직국 군주가 되었으며,
·지증왕 13년(512) 하슬라주 군주가 되었고 이어 우산국을 정벌하였으며,
· 진흥왕 2년(541) 兵部令에 올랐고,
·진흥왕 6년(545) 國史 편찬을 건의하여 居柒夫로 하여금 편찬하도록 하였으며,
· 진흥왕 11년(550)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攻取하였고,
· 진흥왕 23년(562) 가야가 叛하여 사다함을 앞세워 진압하였다.

이처럼 이사부는 지증왕과 진흥왕 대에서 행적이 확인되고 있다. 비록 그의 생몰연대는 확인되지 않지만 그는 지증왕·법흥왕·진흥왕 3대에 걸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었다. 다만 그의 행적은 지증왕과 진흥왕대에 집중되고 있다. 그의 젊은 시절로 보이는 지증왕 때에는 외방의 軍主로서 활동하면서 가야·실직·하슬라·우산국 등을 복속시켰으며, 그의 중년 이후가 될 진흥왕 때에는 병부령에 올랐고 도살성·금현성·가야를 공략하여 복속시켰다. 특히 그의 중년이 될 진흥왕 6년에는 君臣의 善惡을 기록하여 후대의 귀감을 삼고자 國史의 편찬을 건의하여 성취시켰다. 이처럼 그의 행적은 군사적 공적에 집중되고 있으면서도 국사의 편찬을 도모할 만큼 문사적 역량을 겸비했던 인물로 평가될 수 있으며, 적어도 그의 중년 이후의 행적은 국왕 즉 왕권을 지근에서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이 주목된다. 우산국의 정벌은 지증왕 13년(512)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그의 젊은 시절에 해당하며, 그가 실직주 군주로 부임하여 6년 만에 하슬라주로 州治를 옮긴 직후가 된다. 하슬라주의 설치는 신라 북방진출의 기지를 전진 배치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우산국 정벌은 북방진출 기지를 옮겨 배치한 이후 가장 먼저 시도된 군사활동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시기적 의미는 보다 내적인 역량의 결집이라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물론 이 시기의 군사활동의 근간은 말갈과 고구려로 설정되는 주적을 공략하여 강역을 확장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일정하게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주변의 '小國'을 복속시키고, 그로부터 내적인 역량을 극대화하는 과정은 일차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실직주에 이어 하슬라주의 설치 또한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우산국의 복속 또한 동일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적 의미는 실직과 하슬라 주민들의 역량에 힘입어 우산국 복속이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즉 이곳 주민들이 습득하였을 조선·항해술을 전제로 군사적 활동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은 이곳 주민들의 삶의 양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을 것이다. 후대 조선조에서도 울릉도의 벌초작업을 위해 이곳 주민들이 동원되는 예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조에서 강릉지방에 '船名所'라는 지명이 확인되고 있고, 현재 그 위치는 확인되지 않지만 조선기술을 갖추었던 마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곳 주민들의 조선·항해술을 인정할 수 있으며, 주치를 옮긴 시점에서 이곳 주민들의 기술과 역량은 우산국 복속을 추진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산국 정벌은 木偶獅子를 이용한 計略的인 방법이 이용되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전략의 선택은 우산국 사람들이 愚悍하고 또 水深을 믿고 교만하다는 이해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또한 그것은 젊은 이사부의 智略이었다. 그는 이미 우산국 정벌에 앞서 외관으로서 居道의 權謀를 빌어 가야를 정벌할 때에도 馬戱를 이용하는 지략을 보인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지략과 병법은 단순한 속임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신라의 북방진출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군사활동에서 야기되는 희생을 극소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는 자구책의 일환일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