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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세미나 - Ⅲ

제목 이사부 세미나 - Ⅲ
글쓴이 등록일 2002-07-01


신라 대역전의 기반 조성한 이사부



홍 문 식

한국해양소년단강원연맹 사무국장

(강릉, 신영초등학교 교감)



1, 시대적 배경


이사부장군이 신라를 대제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에는 시대적 요구사항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줄 우리의 역사에 대한 고서를 소개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史), 제왕운기(帝王韻紀), 동국사략(東國史略),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응제시주(應制詩註),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사찬요(東史纂要), 동사보유(東史補遺),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동사강목(東史綱目),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수산집(修山集), 해동역사(海東繹史), 동사보감(東史寶鑑),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 신지비사(神誌秘詞), 삼성기(三聖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 단기고사(檀奇古史),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기자지(箕子志), 기자실기(箕子實紀), 기자외기(箕子外紀), 지공기(誌公記), 대변설(大辯說), 진역유기(震域留記),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桓檀古記) 등 많은 사서가 있다. 이들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광개토왕의 업적을 살펴보면 당시의 신라가 처해 있는 실정과 신라가 고구려의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자주국방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고 이사부장군의 전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76년에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기슭에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鎭)으로 재직했던 사람의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그 고분이 주목을 끄는 것은 그 고분의 북벽 중앙에 적혀 있는 묘지명(墓誌銘) 14행 154자와 고분벽화에 적혀 있는 13군 태수들의 명칭 및 백제 장군들의 직책과 이름 때문이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전에 백제분국의 장군들의 직책과 이름
1.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 建威將軍八中侯 餘右(古?)
2. 건위장군 여력 建威將軍 餘歷
3. 건위장군 광양태수 장사 고달 建威將軍廣陽太守長史 高達
4. 건위장군 조선태수 사마 양무 建威將軍朝鮮太守司馬 楊茂
5. 건위장군 광릉태수 양무 建威將軍廣陵太守 楊茂
6. 건위장군 성양태수 왕무 建威將軍城陽太守司馬 王茂
7. 용양장군 매려왕 여력 童(龍?)將軍邁慮王 餘歷
8. 용양장군 대방태수 양무 용양장군 나라태수 장사 모유 龍將軍帶方太守 楊茂 龍將軍樂浪太守長史 慕遺

-위 태수들의 이름은 여고, 여력, 고달, 양무, 왕무, 모유이다. 이들은 원래 백제분국(百濟分國)의 장군이었다.

-위 태수들의 직책은 광양태수(廣陽太守:북경 동쪽 계 방면, 광양이라는 명칭은 원봉(元鳳) 원년(元年) 한(漢) 소제(昭帝) 때에 연군(燕郡)을 고쳐 광양군(廣陽郡)이라 부른 후부터 북경 동쪽 계 방면을 광양이라 불렀다), 조선태수(朝鮮太守:난하 서쪽 방면), 나라태수(樂浪太守:대릉하 방면), 대방태수(帶方太守:대릉하 방면), 광릉태수(廣陵太守:양자강하류 중국동해안 방면), 성양태수(城陽太守:산동반도 방면)이고, 위 태수들이 관할하는 지역은 전에 백제분국이 있던 곳이다. 이를 보면 위 태수들은 전에 백제분국(百濟分國)의 장군으로 있다가 A.D 400년에 광개토대왕에게 귀복한 후 광개토대왕으로부터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항복을 쉽게 받아 내기 위하여 귀복한 장군들에게 종전의 관직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 등 광개토대왕 특유의 외교술과 통치술을 사용하였다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나 백제 본기에는 고구려와 백제(百濟)가 A.D 408년 이전에 요서지방이나 중국동해안지방에서 서로 싸운 흔적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를 보면 위 여고, 여력, 고달, 양무, 왕무, 모유 등은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A.D 396년에 구태백제(九台百濟)가 괴멸되고 온조백제(溫祚百濟)가 항복한 후 A.D 400년에 구태백제(九台百濟)의 후국(侯國)인 대마도 왜와 일본열도 왜 마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광개토대왕에게 귀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新羅), 가야(加耶), 백제(百濟), 대마도왜(對馬島倭), 대화왜(大和倭), 구주왜(九州倭)를 복속시킨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복속지를 통제하기 위하여 복속지를 10국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이를 연정(任那聯政)이라 했는데, 그 치소(治所)는 임나(대마도)에 있었다. 이 임나연정은 고구려에 속하여 고구려 열제가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高句麗國本紀 [註: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에는 대마도왜(任那), 대화왜(伊), 구주왜(倭)로 분리되어 적혀 있으나, A.D 400년에 광개토왕이 왜를 정벌할 때 일본열도에는 대마도왜, 대화왜, 구주왜가 통합된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져 있었다. 이를 분리하여 적은 것은 광개토왕이 왜를 정벌한 후 왜를 분리하여 통제한 고구려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응신조는 영락(永樂) 10년(A.D 400년) 전쟁에 패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영락(永樂)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新羅)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은 흘해이사금 39년(A.D 348년)에 해상세력을 거느리고 신라의 궁성으로 쳐들어와서 궁성을 장악하였지만 정식으로 즉위한 해는 A.D 356년이었다.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은 신하들에게 정무를 위임하지 않고 직접 통치하였다. 이는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의 힘이 그만큼 강하였기 때문이다.

「37년(A.D 392년) 봄 정월 고구려에서 사신이 오니 왕은 고구려가 강성한 까닭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어 볼모로 잡혔다. 三十七年 春正月高句麗遣使王以高句麗强盛 送伊飡大西知子實聖爲質


광개토왕은 A.D 400년까지 신라, 백제, 가야, 대마도, 일본열도왜를 복속시키거나 정벌한 후 대마도에 임나연정을 설치하여 신라, 가야, 백제, 대마도, 일본열도왜를 통제하였다

눌지마립간은 즉위하자 말자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는 복호를 불러들이고, 또 임나연정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몰래 빼내 온 후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벗어났다.

지증마립간은 A.D 500년 4월에 해상세력을 이끌고 신라의 궁성으로 쳐들어와서 궁성을 장악하여 사실상 왕이 되었으나, 소지마립간이 날이군(봉화군), 고타군(안동군)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가 그 해 11월에 죽은 후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A.D 501년에 일어난 동성왕계(東城王系)와 무령와계(武寧王系)의 내분으로 백제가 A.D 502-503년에 고구려에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과 요서분국(遼西分國)을 빼앗기고 국력이 약해지자 신라는 그 틈을 타서 지증마립간 5년(A.D 504년)에 가야 지방으로 진출하여 가야 소국(小國)들을 점령한 후 요지(要地)에 성(城)을 쌓고, 다음해 가야 소국(小國)들을 해체하고 그 곳에 주(州), 군(郡), 현(縣)을 두었다.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6년(A.D 505년) 봄 2월 왕은 친히 국내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하였다. 실직주(悉直州:註 삼척)를 신설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군주의 명칭이 이에 시작되었다. 六年春二月王親定國內州郡縣置悉直州以異斯夫爲軍主軍主之名始於此.」


신라 통제는 초기에는 성공하였으나 후에는 실패하였다. 신라는 미사흔(未斯欣)을 임나연정에,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각 인질로 보내고 임나연정과 고구려에 복속하
였으나, A.D 418년에 인질로 가 있는 복호(卜好)를 고구려로부터 돌려 받고, 같은 해 가을 임나연정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未斯欣)을 몰래 빼내 온 후부터 고구려와 임나연정의 통제를 벗어났다

「진흥왕(眞興王) 23년(A.D 562년) 가을 7월 백제가 변경(邊境)의 민가(民家)를 침략하므로, 왕은 군사를 내어 항전(抗戰)하여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곤 하였다. 9월 가야(註 고령가야)가 배반하니 왕은 이사부(異斯夫)를 시켜 가야를 토벌하고 사다함(斯多含)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앞질러 전단문(檀門)에 들어가 백기(白旗)를 꽂으니 온 성중(城衆)이 겁내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異斯夫)가 군사를 끌고 들이닥치므로 일시에 다 항복하였다. 「二十三年秋七月百濟侵掠邊戶王出師拒之殺獲一千餘人九月加耶叛王命異斯夫討之斯多含副之斯多含領五千騎先馳入檀門立白旗城中恐懼不知所爲異斯夫引兵臨之一時盡降.」

위의 내용에서 보듯이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공격을 받으며 나름대로 국가의 형태를 형성한 것은 지증왕 때부터 차츰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고 이를 개탄하는 지배층의 노력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신라는 해상세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지증왕 역시 해상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으므로 해상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사부에게 각별한 책임을 부여하였을 것이다.

왕의 명을 받은 이사부는 우선 실직국의 군주로 동해안으로 나가게되고 이를 근거로 전략에 대한 대비를 하여왔을 것이다.
[이사부 전략을 그림으로 보면 이해 할 수 있을 것임]

이사부의 전략은 우산국을 정벌 고구려의 해상로를 차단하고 동해의 무역항로를 확보하므로 고구려의 배후 세력을 차단하고 신라의 독립된 무역로를 확보하여 우선 국가의 이익을 보장받고, 고구려의 배후를 공략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사부의 활약상을 보면 지증마립간 때는 하슬라주의 군주로 있으면서 513년 우산국을 정벌하였고, 514년 아라가야(함안)를 병합하였으며, 법흥왕 때는 522년 고령가야와 혼인병합하고, 524년 금관가야를 병합, 진흥왕 때는 병부 이찬이 되면서 550년 남한가 상류를 중심으로 한강유역을 개척하는 데 수군의 전략을 수립 성공하였으며 이어 동해의 고도 울릉도를 근거로 하여 함흥을 정벌함에 있어 대상륙작전을 감행 고구려의 허를 찌름으로써 고구려는 속수무책으로 함경도일대를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해전사를 씀에 있어 고구려의 중국의 동북면 개척전략, 고구려의 태조대왕의 유언을 보면 요동반도의 해상권을 잃지 말라는 유언, 광개토왕의 임나일본부설치를 위해 일본의 본토와 구주 대마를 정벌하는 해전사, 백제의 국가이름이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백제라고 명명한 내용, 백제의 근초고왕 때 태자 근구수를 해군제독으로 명하고 해군을 창설 중국의 동북연안과 동남아를 정벌 22담로를 두는 막강한 해상력을 키우는 과정의 역사.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바로 해상력의 약화가 가져온 결과임은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당나라의 소정방이 해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넘에 있어 백제의 해상력은 이미 스스로 궤멸된 후였으며, 고구려의 멸망 역시 대동강을 역류하는 당나라의 수군을 막을 수 없었기에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도성이 함락되어 멸망하게 되었음은 역사가 너무나도 잘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어설 수 있었음은 강력한 해군력을 키워 해상력을 확보하고, 수비를 철저히 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지치도록 유도한 전략의 성공이라고 본다.

이사부의 대역전극은 바로 해상력을 확보하는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이는 장보고보다도 300년전의 일이며 그는 해상력의 확보만이 국가의 중흥의 길임을 일찍이 깨닫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하였기에 신라가 훗날 반도를 통일하고 남북조시대(북쪽 : 발해, 남쪽 : 신라)를 이끌고 나아가 장보고시대를 열어 우리 조상들의 해상력을 꽃피웠다. 그러나 훗날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견제에 의하여 해상력을 확보하지 못한 결과는 국력을 상실하는 치욕의 길을 걸어야 했던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고 21세기는 해상력의 확보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은 더욱 자명해 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모든 자원(에너지, 식량, 원자재)를 모두 해상을 통해 수입하고 수출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민의 생명선을 바다에 맡겨 놓았다는 자명한 실임을 알고 우리의 후대에는 바다를 지배했던 위대한 민족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뚜렷한 자료가 많지 않은 이사부장군을 재조명하자는 것은 오래 전부터 토호로 자리잡아 막강한 세력을 유지해온 우리 강원의 조상들이 해안선을 따라 발달한 조선술과 항해술이 있었기에 바다건너 우산국을 갈 수 있는 기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강원인의 개척적이고 도전적인 기상을 통하여 21세기 환태평양시대의 해양중심론 즉 강원도가 극동의 해상교통의 중심으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힘과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해양을 가까이 할 수 있고 무한한 자원을 지니고 있는 바다를 배우고 개척하려는 도전적 기상을 키우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자원이 고갈된 비좁은 육상의 벗어나 무한한 자원과 아직도 많은 미답지를 가지고 있는 해양을 개척하려고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해양의 부존자원과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있다. 이른바 "해양혁명(Marine Revolution)" 의 시대를 예견하는 것으로 오늘에 사는 우리의 소명은 바로 바다로 나아가는 우리의 미래를 키우는 일에 모두가 힘을 모을 때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원 빈국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자원을 해상을 통하여 수입하고 있다. 이러한 자원의 이동 통로가 봉쇄된다면 우리나라는 생존에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조선말 우리나라는 해상력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하였기에 수많은 양요를 당하면서도 이에 대처 할 수 없었다. 또 강원도는 휴전선보다도 긴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바다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다. 그래서 더욱 강원의 발전이 늦어지고 있다고 본다. 강원의 주요 항들을 통하여 일찍 무역로를 개척하고 통상을 하였다면 개방에 한발 앞서게되었을 것이다. 더욱 동해를 인접한 극동4개국의 활발한 해상 교통을 통하여 이제 막 그 통상의 태동을 열고 있는 이때 더욱 더 강원인들이 한 마음으로 바다 사랑과 진취적 기상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이사부의 정신을 동해에서 꽃을 피우고, 이 교훈을 깨닫고 이어받아 이제 온 도민이 아니 전 국민이 함께 할 때이라고 본다.
본 연맹은 앞으로 이사부장군의 위업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동해안에 산재한 해양문화를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우리지방의 조선술, 항해술을 고증하고 복원 시켜 우산국 정벌을 재현하는 사업을 꾸준히 추진해 갈 것이며 이사부의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는데 노력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 1145년(인종 23)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최산보(崔山甫) 등 8명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 등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史)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66∼89)이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지은 서사시. 상하2권. 상권에는 중국역대 사적을 7언시로 읊고, 하권은 우리나라의 역대 사적을 7언과 5언으로 엮음.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노래한 서사시로 [삼국유사]와 함께 '고조선(古朝鮮)' 연구에 중요한 사료임.
동국사략(東國史略) :조선시대 박상(朴祥:1474~1530)이 한국 고대부터 고려까지를 서술한 역사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조선세종(재위 1418~50)때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 활자본(을해자). 163권 154책. 제1~127권은 편년체의 본문이며 제128~163권은 오례 8권, 악보 12권, 지리지 8권, 칠정산 8권으로 구성된 지(志)부분이다. 앞머리에 권별 목록이 수록되어 있으며, 제1권의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세종의 성장 및 즉위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행장·지문 등이 별도로 실려 있지않으며 명나라 예부(禮部)에 보낸 고부문(告訃文)에서 재위기간 중의 주요 치적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1452년(문종 2)에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이 총재관이 되고 편수관 박팽년, 기주관(記注官) 신숙주, 기사관(記事官) 김명중(金命中) 등 약 60명 인원을 6방으로 나누어 각기 6,7년간 기사를 분담하여 편찬을 시작하였다. 강목체의 성격이 더해진 태종실록과는 달리 처음부터 편년체로 편집되었으며 세종조에 이루어진 문화정리사업을 기록을 위하여 별도로 지(志)를 붙였다. 편찬과정에서 사신(史臣)이 황희, 최윤덕의 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유로 총재관들이 내용을 고쳐 기록한 사건이 있고, 기주관이 사초 기록된 재상의 일을 집안에 누설해 문제된 일도 있었다. 계유정난으로 황보인과 김종서가 피살되어 정인지가 최종 감수를 담당하였으며, 54년(단종 2)에 필사본 실록이 완성되었다. 73년(성종 4)에 활자본 3부를 추가로 간인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만 남고 모두 소실되자 1606년 다시 4부를 인출하였다. 세종 때만이 아니라 조선초기 사회, 문화 이해에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 일제강점기인 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영인한적 있고 1958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본간행 1977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국역본 발간.
동국통감(東國通鑑): 조선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이 신라에서 고려 때까지의 역사사실을 모아 편찬한 책.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東文選)』과 중국에서 들어온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영향으로 지지(地誌)에 시문(詩文)을 삽입, 편찬하려는 움직임이 대두되어 성종은 노사신(盧思愼), 강희맹(姜希孟), 성임(成任) 및 서거정 등으로 하여금 이러한 형식의 지리지(地理誌)를 편찬하도록 명하였으니, 그것이 성종 12년(1481) 4월 19일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는 이름으로 전권 50권이 완성되었다
동사찬요(東史纂要), 조선 선조 때의 학자 오운(吳澐)이 편찬한 신라와 고려의 역사서, 1609년(광해군 1)
동사보유(東史補遺): 광해군 때의 문신 조정(趙挺)이 저술하고 1646년(인조 24) 아들 유도(有道)가 간행하였다. 단군 이후의 역대 사실을 초록(抄錄)하였는데, 일반 역사책에 누락되었거나 부족한 내용을 보충한 목판본으로 4권 2책이다.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홍만종(洪萬宗)이 1705년( 숙종 31) 단군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간단히 엮은 책.
동사강목(東史綱目):조선 숙종 때의 학자 안정복(安鼎福) 1778년(정조 2)이 저술한 고조선부터 고려까지의 국사책.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영조의 명으로 1769년(영조 45) 편찬에 착수, 1770년에 100권 40책으로 완성된 조선의 문물제도를 분류 ·정리한 백과전서적인 책으로 체재는 중국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예에 따라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市)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의 13고(考)로 나누어 수록.
해동역사(海東繹史): 조선 정조·순조 때의 사학자(史學者) 한치윤(韓致奫)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를 서술한 한국의 역사서.
동사보감(東史寶鑑): 작자미상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1899년(광무 3) 학부(學部 ) 편집국에서 편찬 ·간행한 국사교과서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등에서 주요사항을 뽑아 엮은 편년체(編年體)의 순한문으로 쓴 국사책이다. 단군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 1책, 통일신라에서 고려 의종까지 2책, 고려 명종에서 고려 말까지를 3책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다음 조선시대는 《대한역대사략(大韓歷代史略)》으로 태조에서 선조까지, 광해군에서 고종 36년(1899)까지 2책으로 간행되었다. 당시의 국사교과서 중 내용이 가장 상세하게 정리된 책이었다.


삼성기(三聖記): 신라 승려인 안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을 각각 상,하 권으로 구분하여 합친것이며, 한인한웅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민족의 시발인 한국시대의 한인으로부터 7세 단인까지 3301년의 역사와 신시시대의 한웅으로부터 18세 단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기록한 책

단기고사(檀奇古史):발해의 시조 고왕(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719년(무왕 1)에 썼다고 전해진다. 본래는 발해문으로 씌어졌는데, 약 300년 뒤 황조복이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1905년 정해박(鄭海珀)이 한문본을 국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전함.

규원사화(揆園史話):1675년(숙종 2)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라는 호를 가진 이가 쓴 역사책. 서문/조판기(肇判記)/태시기(太始記)/단군기(檀君記)/만설(漫說)로 구성되어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 초기에 편집 하였다. 계연수로부터 1980년에 공개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제자 이유립(李裕)이 1979년에 영인하였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카시마 노보루[鹿島昇]이다.